마감 2시간 전에 완벽하게 끝낸 사람이 있다?
제 얘기는 아닙니다. 미국 건축사의 상징인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낙수장(Fallingwater)이라는 건물을 지을 때의 에피소드예요. 그는 건축주에게 작업을 의뢰 받은 9개월 동안 아무것도 안 하다, 건축주가 ‘지금 보러 갑니다’ 라는 전화를 하고 운전해 오는 두 시간 동안 완벽한 도면을 그려내 보여줬다고 합니다.
이 일화, 라이트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긴 하지만 왠지 직장인이라면 공감 가지 않나요? 마감이 임박하면 초인적인 힘이 나오고, 끝내는 해내는 우리네 모습 같달까요. 누구나 한번 쯤 있는 경험이잖아요. 낙수장처럼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작품까진 아닐지라도요.
저는 문제가 생겨야 해내는 타입인가 봅니다.
클로드 코드를 처음 만났을 때였습니다. 저는 개인 업무 일지를 만들어 보거나, 제가 좋아하는 ‘삼국지’ 뉴스레터 따위를 만들어 달라고 하고, 가끔 동료들 얼굴을 유명인사들과 합성하는 등의 놀잇감으로만 상대했습니다. 실제로 제가 하는 업무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는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은행 특성 상 개발은 내부망에서만 할 수 있거니와 저 같은 사람이 개발할 수 있는 건 사실상 전무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갖고 놀아보며 느낀 점은 있었습니다. ‘잘만 쓰면 대단하겠는데?’ 그렇지만 그런 생각을 품고 있을 뿐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회사 블로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가 플러그인을 하나 설치했는데, 갑자기 ‘치명적 오류’가 생겼다며 블로그가 제멋대로 닫혀 버린 것이었어요. 외부에 개발을 의뢰했던지라 즉시 대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제가 직접 해결하려면 ‘SSL 인증서…FTP 서버…’ 알 수 없는 단어들을 이해해야만 했습니다.
‘회사의 테스트 앱처럼, 블로그도 테스트 서버가 있다면 미리 플러그인을 설치해 볼 수 있었을 텐데…’
아, 양심에 손을 얹고 이렇게 구체적으로 후회를 한 건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되지’ 하는 막연한 답답함에 회사의 개발자들에게 자문을 구한 결과 정리된 워딩입니다.(후회도 뭘 알아야 하죠…)
클로드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개발에 대한 지식이 0인 사람이야. 워드프레스 기반의 블로그를 사전에 테스트 해볼 수 있는 테스트 페이지를 개발해야 해. ㄱㄱ’ 라고만 쳤는데요. 갑자기 블로그가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겠어요?
클로드 코드를 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답은 1 누르는 겁니다. 저는 클로드 코드가 낙수장 폭포수마냥 좔좔 작성해 나가는 코드에 1만 눌러주며 계속 진행하라는 명령을 주구장창 내렸습니다. 그 때마다 클로드 코드는 멋진 결과물을 보여주었죠.
생각보다 쉽게 나오는 결과물을 보니, 기존 블로그의 아쉬운 점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검색 기능이 이랬으면 좋겠고, UX는 이랬으면 좋겠고…포스팅은 이렇게 분류되면 좋겠고…’
두 달을 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1%의 어떤 것
그런데 아무리 시켜도, 클로드가 못 하는 게 있었습니다. 처음에 그려 넣은 검색창을 못 없애는 거예요!
‘타원형의 검색창을 만들어줘. 돋보기 버튼 위에 마우스 오버하면 검색창이 확장되며, 타이핑할 수 있는 검색창 알지?’
라고 시켰습니다. 그런데 결과물은 처음에 만든 사각형의 회색 검색창 위에 타원의 도형을 대충 입힌 모양이었습니다.답답합니다.
검색창 안에 들어가 있는 회색 테두리의 가로로 긴 직사각형을 없애.
코드 출력… 없앴어요! (안 없앤 채로 거짓 답변)
…Remove gray rectangle in gray oval search bar.
코드 출력… 요청하신 대로 작업했어요.(여전히 검색 박스는 남아 있다.)
아직 안 없어졌잖아. 네 눈엔 이게 없앤 거야? 좋아. 레퍼런스를 던져 주마. 제미나이 UI 스타일로 수정해.
코드 출력… 멋진 제미나이 스타일을 적용했어요.(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근성이 답이라 생각하고 반복했지만, 클로드는 해결하지 못 했습니다. 저는 제미나이에게 묻기 시작합니다.
제가 코드에 대한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클로드가 작성한 코드에서 해당하는 부분을 찾아 수정하기만 하면 끝났을 텐데요. 게으른 저 탓일까요? 저는 클로드 탓을 하고 싶군요. 이 녀석이 작업한 부분의 어떤 것을 수정해야 할지, 명확한 답변을 주지 못 했으니까요. 동문서답만 반복했습니다. 손목이 아파 파스를 붙일 지경이었습니다.
결국 기존에 제 머릿속에 있던 모양을 아예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디자인 레퍼런스를 찾아 던져주며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단, 녀석이 ‘회색 박스’를 절대 떠올릴 수 없을 정도의 새로움을 찾아야 합니다.
이렇게 블로그 구석구석, ‘이걸 왜 못 고치지?’ 싶은 자잘한 것들을 고치기까지는 오랜 시간을 들여야 했습니다.
AI는 집중하고자 하는 것에만 집중하게 해 주는 친구입니다.
앞서 소개드린 채워지지 않는 1%만 빼면요. 때로는 머릿속의 완벽한 그림을 아예 지워버리는 융통성이 필요하고, 때로는 AI가 임의로 만들면 안 되는 것들은 무엇인지 판단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똑똑한 AI는 주인을 인내해야 하고, 저 역시 AI를 인내해야 합니다. 하지만 처음에 세운 목표 ‘비개발자이지만 블로그를 개발하겠다’라는 목표만 잘 따라가면서,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들을 잘 구분할 수 있다면 AI는 머릿속에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만들어 줍니다.
실무에 조금이나마 도움되는 팁 또는 당연한 말들을 새삼 정리해 봤습니다.
- 원하는 그림이 명확하다면, 최대한 구체적으로 프롬프트를 작성해보자.
- 글로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면, 레퍼런스를 찾아서 던져 주자.
- 무언가 부족한데 뭐가 부족한지 잘 모르겠다면, 구태여 찾지 말고 AI에게 보완점을 찾아 달라고 하자.
- 하나의 툴을 사용하다 막히면 다른 LLM의 도움을 요청하자.
이 팁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조금 더 자세히 소개드리겠습니다.
조금 더 게을러져도 괜찮을지도?
오아시스의 ‘The Importance of Being Idle’ 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노랫말을 토대로 번역을 해보면 ‘내 마음이 내켜하지 않는 삶은 살지 않겠다’ 라는 뜻이죠. 그런데 직장인은 이렇게 락스타처럼 살 순 없잖아요? 우리네 일상은 하기 싫은 일을 견뎌 내기도, 하고 싶은 일을 조금은 하기도 하는 매일의 연속이니까요.
그런데 이제 조금은 ‘하고 싶은 일’에만 집중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완벽한 결과물이 머릿속에만 머문 채 손까지 내려오지 못 하던 유형의 직장인이라면, Agentic AI 시대가 환영하는 인재상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AI와 자주 다투긴 했지만, 몇 달 간 제 머릿속에만 그리던 그림을 눈에 보이게 만들어 준 건 AI 였습니다. 저처럼 머리에서 손까지 이르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분들에게 AI는 손이 되어 주리라 확신합니다.
그런데 어쩌죠? 이제는 이 타자 치는 것까지 귀찮아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