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라고 다 고기서 고기인가

고기라고 다 고기서 고기인가
김정훈
미식미식 앱전략팀
먹는 것과 돈 버는 것을 좋아하는 직장인
“회식잡기이야말로 직장인의 중요한 역량 중 하나야.” 내가 사회초년생일 때 한 선배가 말했던 적이 있다. 당시엔 그저 군기잡기식 멘트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꽤나 직장생활의 핵심 속성을 담고 있는 전언이었던 듯 싶다. 생각해보면 회식만큼 복잡하고 섬세한 비즈니스 미팅도 없긴 하다. 처음 보는 소개팅녀 한 명을 위한 식사를 고르는 것도 어렵지만, 스트레스로 가득 찬 여러 인간군상들을 퇴근 무렵 술상으로 모시는 것은 고려할 요소가 훨씬 더 많다. 누가 왜 참석하는지를 고려해서 어울리는 분위기의 식당을 고르고, 적절한 메뉴를 주문하고 적당한 타이밍에 마무리해야 하는 것은 쉽지 않은 법이다. 사회생활의 기본 매너와 처세, 영업적 센스를 두루 갖춰야 하는 일이기에, 회식메뉴를 잘 고르는 것이 일잘러와 결코 무관한 영역만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다. 회식메뉴를 고를 때 가장 안전한 선택은 아무래도 고기다. 노릇노릇하게 잘 익은 고기 한 점과 깔끔하게 떨어지는 술 한 모금에는 호불호가 크게 갈리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소고기는 퇴근 후 직장인이 가지는 최고의 복지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비싼 가격이지만 법인카드로 결제하는 만큼 주머니 걱정 없이 마음껏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한 신문사에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소고기 부위를 조사한 적이 있다. 흥미로운 조사와는 달리 결과는 다소 뻔했다. 1위 등심, 2위 안심, 3위 갈비. 한국은 갈비로 대표되는 구이문화가 대중적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을지로에서만 7년을 근무하면서 근처의 괜찮은 고기집을 가볼 기회가 많았던 것 같다. 그중,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소고기 구이에 한해 가장 대중적이었던 식당을 몇 군데만 소개해본다.
소고기 부위별 위치와 특징 삽화
소고기의 부위별 위치와 특징
을지로 소고기 맛집 4선
  • 1) 상우가든 — 호주산 와규를 등심, 채끝등심, 안심, 갈비 4가지 기본 구이 메뉴로 내고 있는 집이다. 과거에는 데클과 치마살 등 육향이 진한 부위들도 기본 메뉴로 있었는데 이제는 당일 시가 주문 또는 플래터로만 주문 가능하게 바뀐 게 아쉽다. 정갈한 무한 리필 밑반찬과 더불어 고기냄새 베지 않게 초벌구이를 해서 나오는 시스템까지, 까탈스런 사우분들을 맞추기 좋은 장소다. 주류 콜키지도 잔당 5천원(26년 3월 기준)으로, 와규는 적당히 시켜 맛만 보고 BYOB로 단체 와인 시음회를 하기도 좋은 곳이다.
  • 2) 너애하누 — 최근 핫한 한우집. 영포티 버전의 대도식당이라고 생각되는 식당이다. 투박한 무쇠팬에 지방을 문지르고 통 등심을 올려 굽다가 먹기 좋게 썰어주는 방식이나, 팬 위 기름에다 양파·버섯·감자를 볶아 된장밥과 볶음밥으로 마무리하는 시스템이 대도식당을 연상케 한다. 서민형 노포와는 거리가 멀고 프라이빗 룸과 말끔한 상차림으로 영포티를 겨냥한 곳이다.
  • 3) 한우드림 — 을지로에서 다소 거리가 있지만 마음먹고 갔던 곳 (예약 필수). 마장동에서 직송한 한우로 안심·채끝·부채살·살치살·토시살·치마살 등 10종 코스가 제공된다. 구이 외에도 육사시미·육회에 카레·라면·볶음밥까지 나오며, 가성비 면에서 한 번쯤 고기결핍을 해소하기 좋은 집이다.
  • 4) 오발탄 — 강남·강북을 막론한 직장인들의 회식성지. 메인 메뉴는 단연 특양·대창·홍창이다. 억세고 쫄깃한 특양, 부드럽고 촉촉한 홍창, 지방이 많아 고소한 대창까지, 비슷한 비용으로도 소고기를 다양한 식감으로 즐길 수 있어 인기 있는 회식 장소가 됐다.

고기 굽기의 원칙

잘 고른 장소와 메뉴 외에도 회식에서는 서빙과 매너도 중요한 부분이다. 특히 투뿔 이상 한우는 어떻게 굽고 놓여지느냐에 따라 만족도가 크게 좌우되기도 한다. 요즘의 소고기 구이는 가게에서 직접 구워서 서빙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예전엔 정육식당이나 노포 스타일의 점포에서는 직접 구워 먹는 곳이 많았다. 하루는 한 선배가 마블링이 꽃처럼 핀 투뿔 등심을 새까맣게 태운 고무로 만들어서 내 접시에 올려준 적이 있는데, 충격을 심하게 받아서 나라도 고기 굽기의 고수가 되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었다. 고기수첩이라는 책을 사서는 여러 부위의 고기를 직접 사다가 비교해보고 적정한 조리기구와 굽기를 연습했다.
고기 굽기 핵심 원칙
  • 마이야르 반응 — 지방과 근질이 조합된 최고의 풍미를 이끌어내기 위한 핵심 반응. 충분한 온도에서 표면을 잘 지져야 한다.
  • 리버스 시어링 — 두터운 고기는 낮은 온도부터 균일하게 익혀야 한다. 육즙이 날아가지 않는다면 얇은 고기는 자주 뒤집어도 상관없다.
  • 레스팅 — 다 구운 고기는 바로 자르기보다 잠시 두어 육즙이 고루 퍼지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 팬의 성능 — 생각보다 팬의 성능과 두께가 고기를 굽는 데 중요한 요소다. 장비가 곧 기술이다.
굽는 방식과 기술에 따라서 식감과 육즙, 풍미가 크게 좌우된다는 것을 알고 나서, 미국 앵거스도 투뿔 한우만큼 맛있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새 미식에 대한 질문은 조금 바뀌어 있었다. 무엇을 먹을까에서 어떻게 맛있게 먹을까로. 어디서 먹을까에서 누구랑 먹을까로 피벗된 것이다. 외부 동호회를 많이 나가게 된 것도, 와인을 자주 마시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일명 3대 와인동호회라는 곳에서 마리아주에 맞추어 술과 음식을 먹고, 친구와 함께 파티 커뮤니티도 직접 만들어보는 등 업무와는 무관한 사적 모임을 꽤 많이 했다. 나중에 케이뱅크에서 미식동호회를 만들게 된 것도 이러한 영향이 있었던 것 같다. 고기라고 다 고기서 고기인 것은 아니다. 최고급 소고기라도 불편한 상사와 함께 하는 자리에선 질긴 타이어를 씹는 맛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 친구들과 소주 한 잔에 먹으면 스페인산 냉동 삼겹살이라도 웬만한 소고기보다 나을 수도 있다. 회식이란 단순히 ‘모여서 먹는 자리’가 아니라, 인간관계의 역학과 미식의 매트릭스를 담은 맡김차림인지도 모르겠다. 이 대목에서 일본 스시 장인이 쓴 책에서 읽었던 구절이 떠오른다. 장인이 말하길, 최고의 요리사는 자기가 가장 잘하는 요리를 내어놓는 기술자가 아니라고 했다. 최고의 요리사란, 들어오는 손님의 기분에 맞추어 알맞은 요리를 그때그때 최상의 상태로 내어놓을 수 있는 예술가라고 했다. 한 끼 식사는 쉬울지 몰라도, 사회생활이나 미식 중에 쉬운 건 하나도 없는 듯 하다.